직업사례 ⑦ 김희지 | 지역장애인보건의료센터 사회복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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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사례 ⑦ 김희지 | 지역장애인보건의료센터 사회복지사

노태형 0 931

 

김희지 | 경남 지역장애인보건의료센터 사회복지사

  

장애인의 건강권과 행복 추구권을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장애인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녀는 자신이 하는 일이 소소한 일이라고 하지만 장애인을 변화하게 만드는 그녀의 자리가 충분히 가치있고, 빛나는 이유이다.”

 

칩거장애인들을 세상 밖으로 안내하고 싶어요

10년 전 김희지씨는 호주에서 호텔경영학을 공부하며 커리어우먼을 꿈꾸던 유학생이었다. 졸업을 10주 정도 남겨 놓은 2009, 불행은 예고 없이 닥쳤다. 급성 횡단성 척수염이라는 희귀한 질환으로 척수장애를 입었을 때 그녀의 나이는 미래가 전도유망했던 27살이었다.

졸업 과제를 다 마치고 졸업장을 기다리는 상태였어요. 물론 나중에라도 받을 수야 있었겠지만 장애의 몸이 되었으니 호텔경영 졸업증을 받는다 해도 특별히 제가 활용할 수가 없게 된 거지요. 그래서 더 이상 졸업장에 미련을 갖지 않고 한국으로 넘어왔어요.”

6개월 정도 호주에서 병원생활을 했는데 호주의 병원은 쿨(?)했다. 의사들은 너는 아픈 상태가 아니니까 더 이상 메디컬 받을 게 없다. 그러니 병원에서 계속 머무를 필요도 없다고 했다. 치료가 아니라 재활의 문제였으므로 병원에서는 퇴원을 권한 것이다. 결국 한국으로 돌아와 집과 가까운 재활병원에 입원했다.

 

3년간 꼼짝 않고 TV만 보던 그날들

김희지씨가 머물렀던 동네의 재활병원에는 주로 뇌졸중에 걸린 어르신들이 많았다. 척수장애인들이 모여 있는 병원이라면 정보도 공유하고, 서로에게 의지와 자극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병원의 분위기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나이든 어르신들이 그만 살고 싶다, 뭐 때문에 사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이런 소리를 입버릇처럼 했어요. 곁에서 그 소리를 매일 듣다보니 아, 이 병원에 더 있다가는 내가 정말 못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느 날 오후, 병실에서 저녁을 먹다가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 길로 바로 퇴원을 했다. 가족들은 딸에게 필요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좀 더 넒은 집으로 이사를 하였고 공사를 하고 있었던 터였으므로 집에서의 생활은 크게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뭘 하면서 살아야할지 너무나 막연했다. 지인들은 앞으로 어떡하면 좋으냐걱정을 해주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녀가 살아가는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얘기를 해 주는 사람도 그 어디에도 없었다. 3년 정도 꼼짝 않고 누워서 TV만 보았다.

매우 활동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그 이전까지는 빈둥빈둥 누워서 TV만 봤던 기억이 한 번도 없었어요. 장애를 떠나서 남들은 다 무언가 자기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데 나는 항상, 똑같은 자리에서 아무 것도 안하면서 이렇게 살아도 되나 자괴감이 들었죠.”

 

장애인의 권리는 스스로 찾아야 한다

그때까지도 장애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이 없었다. 장애인 콜택시가 있다는 것도, 심지어 활동지원서비스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동사무소도 미리 알고 신청을 하는 사람에게 업무처리는 해주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장애인에게 무언가를 신청하라고 권유하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어디를 가든 엄마가 차량으로 이동시켜주었고, 엄마와 24시간 붙어있는 상황이었다.

온라인으로 사회복지 전공을 한 후 실습에 들어가는 단계였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몰랐어요. 복지관에 전화를 했더니 실습지는 스스로 찾아야 한다면서 손가락도 못쓰면 실습을 시켜드릴 수가 없다는 식으로 사무적인 답변을 하더라고요.”

화가 난 엄마가 시청으로 달려가서 한바탕 큰 소리를 치고 나서야 장애인자립생활센터라는 곳이 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쪽에 가서 많은 걸 배우게 되었고 김희지씨에게도 작은 변화가 시작되었다.

뇌성마비 장애인이었던 김희지씨의 사수는 사업 계획서를 어떻게 써야할 지부터 시작해서 사회복지사가 해야 하는 모든 것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었다.

확실히 같은 처지에 있는 장애인으로부터 많은 것을 현실적으로, 빠르게 공유할 수 있었다. 그 후 집단 동료상담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강사 양성과정을 들은 것이 계기가 되어 강의를 조금씩 하게 되었는데 할수록 그 일에 남다른 매력을 느꼈다.

 

현 직장의 장애인 1호 직원

장애인들의 인식개선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인권에 대한 베이스가 있어야 하고 관련해서 여러 가지 받아야 할 교육들이 많아요. 일부러 필요한 곳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강의를 들었어요.”

내친 김에 대학원까지 진학했다. 석사 논문을 준비하다가 취업이 되어 중단했지만 공부할 때 참 열정적으로 재미있게 했다. 사회복지학이 전문가의 마인드에서 장애인들에게 시혜적인 입장의 학문이라면 대학원에서 전공했던 재활학은 장애 당사자가 주최가 되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훨씬 끌림이 컸다.

지금 그녀는 경남 지역장애인보건의료센터에서 장애인 1호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장애인들의 건강보건을 관리해주는 업무를 맡고 있다. 그녀가 만나본 장애인 중에는 휠체어를 한 번도 못타본 사람도 있고,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밖에 나가서 햇볕을 맘껏 쐬는 일이라는 사람도 있다.

김희지씨는 그런 장애인들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고, 지역의 의료시설과 보조기기센터, 자립생활센터 등 나라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도록 연계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장애인의 건강권과 행복 추구권을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장애인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녀는 자신이 하는 일이 소소한 일이라고 하지만 장애인을 변화하게 만드는 그녀의 자리가 충분히 가치있고, 빛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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