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사례 ⑫ 윤붕구 | 30년 수제 장인 GQ양복점 대표

본문 바로가기
2024년 최저임금 : 시급 9,860원
척수장애인 직업사례
> 게시판 > 척수장애인직업사례
척수장애인 직업사례

직업사례 ⑫ 윤붕구 | 30년 수제 장인 GQ양복점 대표

노태형 0 844

 

윤붕구 | 30년 수제 장인 GQ양복점 대표

  

대한민국 명장을 목표로 오래전부터 준비하다가 10년 전 사고로 공백기를 겪는 바람에 충북 명장 1호에 도전했습니다. 외손녀가 친구들에게 할아버지 자랑을 하는 것을 보고 청년 시절의 고생과 장애인으로서 겪었던 좌절감이 눈 녹듯이 사라졌지요.”

 

3대가 찾는 맞춤양복 충북 명장 1

윤붕구 대표는 30년 경력의 맞춤양복 장인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많은 고생을 했다. 야간 중학교를 다니다가 그나마 학업을 다 못 마치고 곤로 수리공, 자전차포 수리공 등을 전전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고향선배와 같이 제복사의 길로 들어섰다.

처음엔 작업복 점퍼, 지금 말하면 유니폼 같은 걸 만드는 회사에 들어갔는데 전망이 안보여서 신사복 만드는 기술을 배우게 되었어요. 그때는 기성복보다는 맞춤양복을 많이 해 입던 시절이었으니까 전망을 본 거죠.”

신사복을 배우면서 충북에서 열린 기능경기대회에 출전할 기회가 있었는데 대한민국 최고의 양복장인으로 손꼽히는 이성우 선생을 심사위원으로 만났다. 이성우 선생은 양복점의 메카 명동에서 매장을 운영하면서 세계대회에 나가는 선수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청년 윤붕구는 서울로 원거리 출퇴근을 하면서 쟁쟁한 친구들과 함께 이성우 선생에게 기술을 전수받았다.

 

배고픔과 열정으로 배운 양복기술

예전에 일 배울 때는 봉급은 커녕 용돈도 못 받고 다녔어요. 어느 정도 기술이 되어야 돈을 받을 수 있는데 그냥은 기술을 절대로 안 가르쳐주니까 공짜로 가서 심부름을 해주며 곁눈질로, 어깨너머로 배우는 거예요. 그땐 연탄다리미를 쓸 때라서 난로 위에 항상 다리미를 올려놓고 달구는데 그거 옮기면서 손에 화상도 많이 입고 그랬어요.”

선배기술자가 퇴근한 뒤에 몰래 들어가서 연습하면서 기술을 익혔다. 어느 정도 실력이 생기고부터는 상의에 얼마, 하의에 얼마 하는 식으로 일당을 받았는데 제대로 된 봉급이 아니라서 생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배고픔과 열정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 그런 시간을 견뎌내며 마침내 자신의 양복점을 오픈하여 지역의 명품 장인으로 자리를 잡아 나갔다.

10년 전의 일이다. 계단을 내려갈 때면 다리에 힘이 풀리고 넘어질 것 같은 현상이 자주 발생했다. 병원에 가봤더니 흉추디스크라고 진단했다. 직업병이려니 생각했다. 일을 계속 해야 하는데다 척추와 관련된 수술인 만큼 신중을 기해야 했기에 수술을 해야할지, 치료를 받아야할지 여러 병원을 다니면서 알아보았다. 그러다가 한 병원에서 5일이면 수술 후 말끔히 퇴원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입원을 했는데 수술은 실패였다. 깨어나 보니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전부 마비가 된 것이다.

 

가족과 고객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래도 조금만 운동하면 걸을 수 있을 줄 알았어요. 5년간 재활병원을 엄청 열심히 다녔으나 소용이 없더라고요. 양복점 운영을 남한테 맡기고 내 휴대폰으로 가게 전화만 돌려놓았는데 단골들이 계속 전화가 오는 거예요. 옷이 이래서 불편하고, 저래서 안 맞는다면서 저더러 점포에 와서 앉아만 있어달라고 해요.”

그러나 재단은 둘째치고라도 채촌(몸 치수를 재는 일)을 하려면 기립을 해야 하는데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으니까 힘들었다. 체념하고 양복점을 아예 처분할 생각으로 계약까지 마쳤다. 그랬던 윤붕구 대표를 가족이 다시 일으켜 세웠다. 아내와 아들들은 집에만 갇혀 있으면 우울증이 온다면서 돈보다는 소일거리라고 생각하고 사람도 만나고, 친구들도 만나라며 위로와 격려를 해주었다. 다시 일을 하기 위해 윤 대표는 자신에게 특별히 맞춘 기립기 휠체어를 인천까지 가서 직접 제작하였고 재단대는 휠체어 높이에 맞춰 낮게 제작했다. 손님들은 윤 대표에 맞춰 다리를 살짝 구부려주기도 하고 몸높이를 낮춰주면서 배려를 해주었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맞춤양복의 자부심

잘 만들어진 수트는 단추를 모두 채웠을 때 앞품이 뜨면 안 되거든요. 아무리 비싼 브랜드 양복을 잘 생긴 배우가 입고 나와서 광고를 한대도 저한테는 그런 결함이 먼저 보여요.”

한번은 90이 넘으신 어르신이 마음에 안 드는 양복을 가지고 와서 딱, 맞게 수선해 드렸더니 아들, 손자까지 3대가 양복을 맞추고 갔다. 원주, 전주, 세종시 등 멀리서도 찾아주시는 분, 완성된 옷을 입어보고 역시 최고!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손님들 덕분에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양복점 안에 충북 명장 1호 상장이 걸려있어요. 외손녀가 친구들을 데려와서 상장을 가리키며 할아버지 자랑을 하는 것을 보고 젊은 시절의 고생과 장애인으로서 겪었던 좌절감이 눈 녹듯이 사라졌지요.”

한 때 청주교도소에서 18년간 양복기술 강의를 한 적이 있다는 그는 누구든 쉽게 따라하고, 익힐 수 있는 양복기술 교재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조금씩 준비를 해왔다. 아마 내년쯤 결과물이 책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어떤 명품 옷이라도 한 사람의 체형에 맞추지 않는 한 맞춤양복만이 가질 수 있는 멋과 편안함을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는 윤 대표의 목소리에서 30년 수제 장인의 자부심이 묻어났다.

 

척수장애인 직업사례집 일상의 삶으로 Ver.3바로 가기

 

0 Comments